청동기시대 거제도에는 큰 3부족(고인돌 분포도)이 있었는데 가칭, '둔사족(둔덕 사등면)', '연하족(연초하청면)', '일운족(일운 아주)'이다. [이 외 작은 부족은 거제면 명진리와 남부면 다대포일대]. 3부족이 하나로 통일된 시기가 서기 1세기쯤(독로, 두로국)이며, 그 소재지는 육지와 가장 인접한 지금의 '사등'일 가능성이 매우 높으나, 상군(裳郡)설치 時 치소였던 둔덕면 거림리도 배제할 수 없다. 이로부터거제도의 이름이 "사도도(沙都島)"라 불리었다. 그러나 거제도는 해상무역의 중간 기착지의 역할을 수행하다보니 거제도의 각 지역을 하나로 묶는 강력한 소국가로성장하지는 못했다. 거제현(사등 둔덕)은 육지에 가까운 관계로 고성지역과 문화의 교류가 활발했으나, 남부지역인송변현과 아주현은 해상무역의 기착지로써해상문화의 영향권에 있었다.
가야시대에는 경남지역으로부터 가야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긴 했으나 가야정부의 통제권에 있지는않았다. 그 이유는 고구려 신라 백제처럼 가야국은 제국주의 국가가 아니라 도시국가 연합체인 관계로 남부해안도서 지방은 각기 독립된 행정을 유지했으며, 거제도 토호세력이 어업과 무역을 기반으로 지역 행정경제를꾸려나갔다.
◯1400여년 전에 거제도는 일본, 백제, 가야지역의 해상교통의 중간 경유지로써 특히 아주, 지세포, 구조라,다대포, 율포등을 거쳐 남해 섬진강 서해안으로 선박들이 이동했다(고인돌 거제도 남쪽 분포지역과 일치). 그 당시에는 거제도를 "사도도(沙都嶋)"라 일컬었으며, 그 뜻은 "바닷가 모래가 많은 고을 섬"이라는 뜻으로 제법많은 주민이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거제도는 동아시아의 활발한 해상무역의 중심에 있었으며, 뚜렷한 국가의식이나 영토 경계가 없었던 시기라, 언어 또한 거제도과일본 대마도 큐우슈우(九州) 북부지방은 같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가 가야국을 점령한 이후부터는 거제도는 신라정부의 통제권에 놓이게 된다. 이때까지도 "거로현(居老縣), "송변현(松邊縣)","매진이현(買珍伊縣)", "거제현(巨濟縣)"이 각각 독립된 고을이었으나, 신라 문무왕 17년(677년)에 둔덕면 거림리에 상군(裳郡)을 설치하면서중앙정부의 직접적인 통치가 시작된다. 이에 거제 섬을 ‘상도(裳島)’라고 부르는계기가 되었는데, 이후 조선시대까지 ‘거제도의 별칭’으로 ‘상도(裳島)’라는 명칭을이어왔다.
685년(신문왕 5)에는 상주군(裳州郡)으로 개칭했으며, 신라 경덕왕 16년(757년)부터 개명한 3현, 아주현(鵝州縣,거로) 명진현(溟珍縣,매진이) 남수현(南垂縣송변현)을 거제현의 속현으로 삼으면서, 거제군(巨濟郡)으로 개칭되었고, 부곡과 향을 동시에 설치하니이로부터 중앙정부에서 섬 전체를 "거제도'라 부르게되었다. 이로써 거제도에는 4현(縣) 3부곡(部曲) 2향(鄕) 1장(莊)의 행정구역을갖추게 된다.
◯소성왕(昭聖王) 원년(799)에는 청주(菁州: 現 진주)의 거로현(居老縣), 즉 아주현(鵝州縣)을 국학생(國學生)의 녹읍(祿邑;食邑)으로 삼았다고 한다.이 같은사실은 아주현지역의 농업 생산력 기반이상당하였으며, 그 결과 신라 중앙정부의 직접적인 지배가 강화되었음을 의미한다. 고려초기에는 육지에서 가장 가깝고 인구가 가장 많아 안전한 거제현에 오양역원을 설치하였고, 983년(성종 2년) 거제현이 기성현(岐城縣)으로 개편되었다가, 1018년(고려 현종 9년) 거제현으로 다시 복명되었지만, 거제고성통영 지역을 묶어서 <자고현(自固縣)>을 거제현의임내에 두면서 행정규모가 확대되기도 했다[최초 광역통합행정구역].
◯고려시대 거제지역의 군현체계도 재편에 대하여 살펴보면, 12목(牧)이 설치된 성종 2년(983년)에는 기성현(岐城縣)으로 개칭하여성을 쌓고 12목 가운데 하나인 진주목(晋州牧)에 편입되었으며, 당시 본도(本島)의 칠천도(七川島)와 가조도(加助島)는 목장(牧場)으로 상마(上馬)의 공급처가되었다. 성종 14년 이래 개편된 12절도사(節度使)체제에서는 거제지역이 산남도(山南道)에 속하여 진주(晋州)절도사의통제 하에 속하였다. 5도 양계체계로 재편되기 시작하는 현종 9년(1018년)에는 지금의 통영과 고성지역인 자고현(自固縣)을 거제현의 임내에 두고 현령(縣令)을 파견하면서경상도(慶尙道)의 진주목(晋州牧)에 소속시킴으로써거제현이 주현(主縣)으로 됨과 동시에 그 행정규모가 확대되었으나, 뒤에고성현이 분리됨으로 인해 다시 그 규모가 줄어들었다.
원종 12년(1271)에는진도의 삼별초 항쟁군이 거제지역을 내습함으로 인하여 거제현과 명진현 등의 속현의 관리와 가솔들 약1000 명정도가 인근 내륙지역인 거창현(居昌縣)의 가조현(加祚縣) 등지와 진주목의임내인 영선현(永善縣)으로 분산·이주시켰다. 하지만 대다수 거제민은섬에 남아 생활했으며, 거제현령이 거창군 가조면 거제현으로 부임하면서 거제 본섬은 행정권 밖에 놓여있게되었다(이를 중앙정부에서 섬이 텅 비어 있다고 기술한다). 거창군거제현은 충렬왕(忠烈王) 때 관성(管城)에 병합하였다가곧 복구하였다. 우왕(禑王) 때에는 서해도도관찰사(西海道都觀察使)인 조운흘(趙云屹)이 황폐화된거제섬의 농업·어업의 산업 생산력과 군사적 기능을 복구하는 방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비록 행정관청은 육지에서 더부살이를 하고 있었지만, 남해안의수군진영은 그대로 존속하였다. 이 후에 몽고의 일본 침략과 맞물러 거제 본섬에는 고려말 1300년대 초기, 송변현에 수군진영 '가라산방어소(다대포)'가설치되면서, 거제본섬에는 다시 육지로부터 유입되는 유민으로 인해, 인구가증가했다. 1356년 (공민왕5년) 김보(金普)가 거제도가라산(加羅山)으로 유배왔는데, 이를 관리한 관리는 수군진영가라산방어소만호였다. 또한 태조1년 1392년 고려 왕씨들이 둔덕기성으로 유배왔을 때에도, 이들을 통제관리한 관리는 ‘견내량 수군만호’였다. 또한 조선초기 경상우수영을 거제도 오아포(가배량)에다 설치한다. 태종11년 1411년, 가배량(加背梁, 통영)·견내량(見乃梁) 등지의 만호로 하여금 옥포(玉浦)로 옮겨지키게 하였으니, 이른바 그 목구멍을 틀어막은 것이었다. 수군만호(水軍萬戶)가 수어하는 곳이 여덟이니, 고성(固城) 가배량(加背梁), 지금은 거제(巨濟) 옥포(玉浦)에 있으니도만호가 수어한다. 병선 22척, 군사 1천 1백 22명이었다. 거제(巨濟) 영등포(永登浦)에는, 병선8척, 군인 7백 20명이 있었고, 1404년 견내량(見乃梁), 거제(巨濟) 옥포(玉浦)에는, 병선 20척, 군사 9백 40명이다. 1418년당시 오아포 수군절도영에는 병선 28척, 군사 2천 6백 1명이 주둔했다. 조선태종 때 거제본섬 수군인원만 3000 여명이 넘었다. 수자리 살던 수군이 대부분이라 그 가족을 헤아리면, 조선건국 1410년경 엄청난 인원이 거제도에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통일신라 이래 고려시대까지 거제지역은 진주목의 관할 아래에 있었으며, 중앙정부의 지방통치 관철, 정치·군사적 상황에 따라 중앙정부로의종속적 재편을 겪었고, 군현 행정관청의 존립적 위기까지도 맞이하게 되었다. 거제는 통일신라시대부터 중앙정부의 지방제도에 따라 진주의 군현에 속하다가 조선시대는 경상우수영관할로 이어왔고근대에는 잠시 동래부에 속하기도 했다.
◯조선시대부터는 거제현(巨濟縣)에 면리제가도입되었다. “거제현⇨ ①사등면 + ②둔덕면, / 아주현, 고정부곡 ⇨③고현면, / 송변현, 명진현 ⇨④읍내면(동부,서부),/ 하청부곡⇨⑤청하면(淸河面), / 죽토부곡말근향 덕해향 연정장 ⇨⑥연초면,"으로 바뀌면서 6개면(面) 120개리, 7진영 7목장의 체제를 갖추고 변방의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된다.
이미 1801년 이전에 고현면(古縣面)이 일운(一運)과 이운(二運)으로 분화되고, '읍내면,하청,연초,일운,이운,사등,둔덕면(河淸·延草·一運·二運·沙等·屯德面)'의 ‘7개면 체제’로 바뀐다. 그 후 읍내면은 그대로 둔 채, 종래의 청하면(淸河面)의 명칭이 하청면으로 바뀌고 있다. 또한 고현면의분화는, 각기 지세포와 옥포, 조라포가 면내에 자리 잡아예전의 진하리(鎭下里)를 중심으로 인구의 밀집이나 생산 활동의 활발함이 반영된 소산으로도 여겨진다.
갑오경장 時 둔덕면(屯德面)에 속하였던 '한산도'가 그 인근 군소 도서를 묶어서 독립된 면이 되었고, 연초면(延草面)과 하청면(河淸面)에서 외포면(外浦面)과 장목면(長木面)이 떨어져나옴으로써 "10개면(한산도 포함)" 139리로 대폭 불어나게 되었다. 광무 4년(1900년) 통제영터에다 진남군(鎭南郡)을 설치하면서 한산도(閑山島) 비진도 등부속도서가 통영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일제 이후부터 오늘날까지 거제도의 면리 편성은 조선말기의개편이 그 골격을 이룬 셈이다.
18세기 후반에발행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는 읍내면(邑內面)·사등면(沙等面)·둔덕면(屯德面)·고현면(古縣面)·연초면(延草面)·청하면(淸河面)의 6개 면에 호수가 6,981호, 인구가 30,023명으로나와 있으며, 20세기 초반 대한제국 말기에 조사된 『민적통계표(民籍統計表)』에는 동부면(東部面)·서부면(西部面)·둔덕면·사등면·연초면·하청면(河淸面)·장목면(長木面)·일운면(一運面)·이운면(二運面)·외포면(外浦面)의 10개 면에 호수가 8,152호, 인구가 41,713명으로기록되었다.
2) 거제부(巨濟部) 면리제(面里制)의 변천(變遷)
조선후기 거제부의 면리제의 변천을 살펴보면, 그역사의 뿌리가 아주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약 1400 년前, 신라시대에설치되었던 향, 부곡, 현(鄕,部曲,縣)을 그 바탕으로두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초기부터 거제현(巨濟縣)에 면리제가도입되었고, 6개면(面) 7진영 7목장의 체제를 갖추고 변방의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조선후기 면리제 변천에는 두 가지 주목 할만 점이 있다.즉 18세기 단계까지를 살펴보면, "6개면 120개리"로 짜여져 있었는데, 그 중 읍내면(邑內面)은 동·서부로나뉘어 있었다. 그런데 19세기에 접어들어서는 "7개면 체제"로 바뀐다. 곧 읍내면은 그대로 둔 채 고현면(古縣面)이 一運과二運으로 분화 현상이 나타나고, 종래의 청하면(淸河面)의 명칭이하청면으로 바뀌고 있다.
아울러 ① 리수가 83坊으로 급속히 줄어든다. 아래 표에서도 알 수 있듯이둔덕면(屯德面)과 하청면은 무려 13동이 줄고 있다. 이것은 하청면의 경우에서처럼 합동(合洞)한 예도보이지만, 호구총수(戶口總數)에서 보이던동리가 대부분 한산도 인근 해역의 지명이고 보면 이웃 고을이었던 고성현과의 행정 구역 조정을 예상해 볼 수 있다.
② 또한 고현면의 분화는 각기 지세포와 옥포, 조라포가면내에 자리잡아 예전의 진하리(鎭下里)를 중심으로 인구의 밀집이나 생산 활동의 활발함이 반영된 소산으로도 여겨진다. 1801년 이전에 읍내면의 동·서부 외에 하청,연초,일운,이운,사등,둔덕면(河淸·延草·一運·二運·沙等·屯德面)의 7개면의 분화가 확인된다. <1832년 거제읍지>
③다음으로 갑오경장시의 전국 행정 구역의 개편의 결과로 보여지는 19세기말의 단계이다. 이전까지의7개면 가운데서 둔덕면(屯德面)에 속하였던 '한산도'가 그 인근 군소 도서를 묶어서 독립된 면이 된다. 그리고 연초면(延草面)과 하청면(河淸面)에서 외포면(外浦面)과 장목면(長木面)이 떨어져나옴으로써 "10개면(한산도 포함)"과 139리로 대폭 불어나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이후부터 오늘날까지의 거제도의 면리 편성은 이 시기의 개편이 그 골격을 이룬 셈이다. 그런데 이 무렵의 특징을 살펴보면 상당수 신설된 동명(洞名)도 있지만, 이운·하청·장목면에서 보듯이 옛 지명을 복구하여 쓰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④이후 거제군(10개면)을 거쳐, 1914년 용남·거제 양군(兩郡)을 통합하여 통영군(統營郡)이라 개칭하였고, 1953년 거제군 복군 時, 한산도는 통영군에 남겨두고 現 거제시관할도서로 분리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3) 거제(巨濟)의 호구(戶口) 및 방리수(坊里數)
다음으로 거제도의 호구와 방리(坊里) 변화를 살펴보기로하자. 거제인구통계는 1913년까지는 한산도 용호도 등 부속도서를포함한 것이고, 1953년 거제군 복군부터 현재까지는 現 거제시 관할지역 인구통계이다. 조선시대 거제인구는옛 문헌 자료마다 그 차이가 크나, 전체적인 인구 변화추이는 대체로 잘 파악할 수 있다.
거제는 조선시대까지 군역의 기피, 사노비 누락, 육지에서 도망 와 숨어 살던 사람, 해상유민 등, 정확한 인구집계가 사실상 불가능 했으며, 일부 수군진영의 수군과유민은 제외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실제 인구통계는 관청에 기재 등록된, 가용할 수 있는 백성의 통계였다.
(1) 청동기시대는약 1500명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거제도 內, 패총과 고인돌의 분포, 그 크기로 추정할 수 있다. 연초 하청지역과 둔덕 사등지역이 인구밀집지역이었다. 2세기에서 6세기 사이 거제도 '독로국'의 호수는 약 1000여家 정도, 4~5천명 이상의 인구 였을 것으로추정된다. 통일신라시대에는 5000명 이상으로 추정되며, 거제도 內, 둔덕사등의 거제현, 아주옥포지세포의 아주현, 거제면 명진현, 남부동부면 송변현 지역이 각 지역 중심지로써 그역할을 했다.
(2) 983년 고려성종기성현(岐城縣) 사등 거제치소 이후로 해상교역의 부흥 속에 1018년거제현(巨濟縣) 인구가 약10000명이 되었다. 이 당시 고려개경 정부에서 고을 현縣의 승격 근거로써 인구 10000 명을 기준으로 삼았다. 이후 1272년 거창군 진주 등, 육지로 옮겨가면서 인구감소가 크게 일어났다. 이 후에 몽고의 일본 침략과 맞물러 고려말기 송변현에 수군진영 '가라산방어소'가 설치되면서, 거제도에는 다시 육지로부터 유입되는 유민으로 인해, 인구가 증가했다.
또 조선초기 경상우수영을 거제도 오아포(가배량)에 설치된다. 태종11년 1411년, 가배량(加背梁, 통영)·견내량(見乃梁) 등지의 만호로 하여금 옥포(玉浦)로 옮겨 지키게 하였으니, 이른바 그 목구멍을틀어막은 것이었다. 수군만호(水軍萬戶)가 수어하는곳이 여덟이니, 고성(固城) 가배량(加背梁), 지금은 거제(巨濟) 옥포(玉浦)에 있으니 도만호가 수어한다. 병선 22척, 군사 1천 1백 22명이었다. 거제(巨濟) 영등포(永登浦)에는, 병선 8척, 군인 7백 20명이 있었고, 1404년견내량(見乃梁), 지금은 거제(巨濟) 옥포(玉浦)에 있으니, 병선 20척, 군사 9백 40명이다. 1418년 당시 오아포 수군절도영에는 병선 28척, 군사 2천 6백 1명이 주둔했다. 조선태종때 거제 수군인원만 3000 여명이 넘었다. 수자리 살던수군이 대부분이라 그 가족을 헤아리면, 조선건국 후 1410년경엄청난 인원이 거제도에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초기 경상우수영의 거제도 설치와 수군진영 구축, 거제현이설로 1500년경, 약10000명 이상의 인구수를 갖게 되었고, 임진왜란 때까지 꾸준한 인구 증가가 일어났다. 그러나 임진왜란 동안 급격한 인구감소를 겪은 후에, 이후 약 100년 동안 육지로부터 10000명 이상의 이민자와 수군장정이 들어오면서 1680년 이후에 거제인구수가 20000명을 넘게 되었다.
(6) 1790년대 말(지승지도, 여지도) 총 24734명(남:11540, 여:13194).
(7) 1800년대초(여지도) 총25220명.
(8) 1832년 거제읍지, 총30,023명 (남: 14,822 여: 15,201).
(9) 1880년 31,281명. / 1941년 97,727명. / 1956년105,048명. / 1990년 144,233명. / 2000년 176,028명./ 2010년 1월 225,903명.
규장각기록에는, 조선초기 세종 때 거창에서복귀한 거제인은 군정(軍丁) 103명, 주민153세대 인구 423명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거제 전체 인구통계와는 거리가 멀다. 실제로는 1270년부터본섬에 남아있던 거제민과 더불어 고려말기부터 육지에서 이주한 유민 수천 명이 거제도에 거주하고 있었다. 거창군에서환도하기 전에 설치된, 거제도 수군진영인원(약 3000명)도 제외한 것이었다. 또한이후 거제7진영이 설치되고 뭍으로부터 유입되는 유민이 증가하여 숙종(1674년~1720년)때 주민 6641세대인구 32,108명으로 기록되어 전하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문서에는 18세기 중엽까지 5천 수백여 호의 원호(元戶)에 2만 4천여명이라 전한다. 그러다가 18세기 말엽에는 원호 6,981호,인구수 30,023명으로 불어나서 자료마다 현격한 차이를 드러내며, 이후로는 6,600여 이상의 호와3만 명을 웃도는 인구수가 지속된다. 단, 19세기말엽에는 행정 개편과 관하 군진(8진영)의 폐지가 이뤄지면서급격한 감소세로 돌아서게 됐다. 조선시대에는 잦은 왜란과 바닷가 어촌의 특징인 '여초현상'으로 성비 불균형이 극심했다.
근현대 6.25전쟁 중, 거제인구는 주민 10만 명, 피난민약15만 명, 포로 17만명 등, 한때 약42만 명이나 되었다. 이후 1985년부터의 인구증가와'남초현상'은 조선경기 활성화에 기인한 것이다.
● 참고로 거제의 읍치에 대하여 살펴보자. 신라시대상군(裳郡)의 설치 때, 읍치가 거제현 둔덕면 거림리였고, 고려시대 기성현 설치 時부터 거제치소는 사등면 사등성일대인 것으로 확인된다. 우선 고려사절요에는 1226년1월 고종13년 거제현령 진용갑(陳龍甲)이 왜가침구하여 사도전(沙島戰)이 일어나, 적 2급을 참살하니 적이 밤에 도망하였다. 사도(沙島)는 고현(古縣) 동쪽에 있다. 거제읍지 편에는 고려 고종(高宗) 때에 왜적(倭賊)이 침입하자, 현령 진룡갑(陳龍甲)이 수군(水軍)을 이끌고사도에서 싸웠는데 적이 밤에 도망쳤다. 그리고 거제부 청구요람 고지도에도 사등 앞바다 '사두도(蛇頭島, 沙島)'를 진용갑이 싸워 이긴 섬으로 표기하고 있다.
거제현 치소 북쪽 섬에 왜구가 침입했다는 당시 기록으로 볼 때, 고려시대 거제현 치소는 사등성임이 확실해 보인다. 그리고 1422년 거창군에서 다시 환도(還島) 했을 때에도옛 치소로 돌아왔으나 여러 형편이 좋지 않아 고현(고정리)로치소를 옮겼다고 한다. 조선시대 1432년부터는 거제현 고현성, 이후 1664년 거제현 거제부 거제면 서상리로 옮겼다.
거제도 본섬의 명칭도 사도도(沙都島), 상도(裳島), 거제도(巨濟島)로 바뀌었다. 1690년 거제면 동상리 김진규 선생은 그의 문집에, 당시 거제도본섬을 '상도(裳島)'와 '거제도(巨濟島)'로 병기하여 사용했다.